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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국보 제 52호 장경판전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살아가는 이야기/여행하기

by 꿈을 낚는사람 2024. 4. 1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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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 

 

 

 

 

 

 

입장료 무료
주차료  이륜,경차 2,000원 / 승용,승합 4,000원 / 버스 6,000원 
관람시간 하절기 08:30 - 18:00
              동절기 08:30 - 17:00
해인사

 

 

해인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며 사적 제405호 입니다. 순천시 송광사, 양산시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3보라고 불립니다. 3보라는 것은 불교에서 불, 법, 승을 뜻한다고 합니다. 해인사에는 법보(팔만대장경), 통도사 볼보(진신사리),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사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산광역시 범어사, 구례군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보입니다. 

 

 

 

명승 제62호 가야산 해인사 일원과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제52호 장경판전, 국보 제206호 고려목판, 국보 제333호 건칠희랑대사좌상,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이 국보가 있습니다. 

 

 

 

남북국시대 신라 802년 애장왕 3년 창건되었습니다.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과 이정 두스님 입니다. 소성왕의 어머니 성목태후와 애장왕은 해인사에 2500결을 시납했습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나온말로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로 부처님의 정각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2년에 정중탑을 중영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오래된 건물로 대적광전, 응진전, 구광루, 해탈문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경상남도 합천군 가양면 치인리 해인사 경내 장경판고 2동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국보 제32호 입니다. 대자경판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입니다. 해인사 대장경판, 재조대자경이라고 불립니다. 고려시대를 거쳐서 조선까지 매우 여러번 인쇄를 했다고 합니다.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월정사" "부산의 동아대학교에는 해인사 대자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전체 대장경의 경판숫자는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8만 1258판으로 집계되었는데, 2014년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 관리계획서에 따른 조사등으로 최종적으로 8만 1352판이라고 합니다. 인쇄본은 현재 북한 모향산 보현사에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팔만대장경 역사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 고종 23년 부터 고종 38년까지 15년에 걸쳐 간행되었습니다. (1236년 ~ 1251년) 불교에서는 8만 4천이라는 많다는 상징적인 숫자라고 합니다.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모았다는 자신감이라고 합니다. 

 

 

 

  • 11세기 거란군의 침입을 막았다.현종 대부터 선종대까지 약 80년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권을 포함되었는데, 이것은 팔만대장경의 제작된 동기라고 합니다. 
  • 초조대장경은 고종 19년(1232년) 몽골군이 침략해서 소실되었고,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에 일부분인 1715년 인경본만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 태종 ~ 세종 대에 일본에서 팔만대자경에 관심을 보였고, 이마가와 사다요, 간레이 히타케야마 요시나리, 원도의, 도전, 원의정, 원의고 등이 관심을 가지고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여러번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태종때는 코끼리까지 가져왔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고 하여 연유를 거절했습니다. 세종 5년 세종실록에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느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즉 정무적 판단때문 이었습니다. 
  • 대장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조선 중기 초유의 국난도 버텨냈습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7일에 성주를 점령했는데, 이때 곽재우, 김면, 정인홍이 각각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섰다. 이때 해인사는 무사했다.
  • 해인사에서 발생한 화재들 총 7번 걸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숙종 21년 1695년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 숙종 22년 1696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 영조 19년 1743년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 영조 39년 1763년 화재 / 정조 4년 1780년 무설전 화재 / 순조 17년 1817 수백칸 당우 화재 / 고종 8년 1871 법성요 화재 가 이었는데, 이것은 화재를 방지하는 과학적 설계와 배치가 되어있었던 덕분이기도 합니다.
  • 6.25 전쟁때 북한군이 불교 사찰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김영환 장군이 해인사 주변에 기총 소사를 하는 선에서 무력 시위를 하였고, 막아 냈습니다. 현재 입구에서 성보박물관에서 올라올라오시면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장경판전은 앞에 수다라장 뒤편에 법보전 양쪽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이 있습니다. 안쪽에 국보 제32호 고려팔만대장경판,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고려각판이 있습니다. 

 

 

 

 

 

세계기록유산

 

 

2007년 6월에는 고려대장경판, 제경판을 한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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