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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살아가는 이야기/여행하기

by 꿈을 낚는사람 2023. 11. 1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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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하절기 4월 - 9월 : 매표시간 09:00 ~ 18:00 관람시간 09:00 ~ 19:00

동절기 10월 - 3월 : 매표시간 09:00 ~ 17:00 관람시간 09:00 ~ 18:00

 

요금표

어른 개인 4,000원

청소년 및 군인 2,000원

어린이 1,500원

 

 

 

 

양동마을 문화관 

무료 /  관람시간 17:00 까지 / 매주 월요일 휴관 

 

 

이향정 고택 

1965년 숙종 21년 지어졌으며, 온양 군수를 지낸 이범중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뒤뜰에는 큰 향나무가 2그루 있습니다. 

안채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 쌓은 담장은 사랑채 앞으로도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안마당이 넓고 방앗간채가 따로 있으며 곳간이 매우 많습니다. ( 집주인이 부유하는 것을 짐작)

 

강학당

여주이씨 집안의 서당 이며, 지족당 이연상이 먼저 터를 정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그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1867년 조선 고종에 학당을 세워 큰 아들 경암 이재목이 많은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일제강정기때에는 독립운동의 주요 터전이었으며, 특징이 대문과 담장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졌습니다. 강당은 명리재이며 장판각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으로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동쪽 행랑채는 서당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곳입니다. 

*이석채 :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 이연상의 4대손입니다. 

 

 

 

심수정

여주이씨 문종에서 조선 중기 학자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1560년 (조선 명종 15년)경에 지은 정자 입니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님인 회재 이언적 대신 노모를 모신 분입니다. 지금 있는 정자의 경우 철종 때에 행랑채만 빼고 모두 화재로 타버렸습니다. 현재 모습은 1917년 원래 모습을 살려 다시 지은 것이며, 안락정(마음을 고요한 물과 같이 가지라) 과 강학다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마을 서당의 역할을 했다고 해요. 마을 정자 중에서 제일 크다고 합니다. (10개) ㄱ자로 배치하고 누마루를 두었고, 무첨당과 향단을 바로 보기 위해서 지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첫돌사진을 촬영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앞에 표시를 해두곤 합니다.

 

 

백리향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옆에는 스튜디오 사용되고 있는 곳 도 있답니다. 이 처

럼 살림채 뿐만 아니라 다른용도로 사용하는 곳도 있으니 확인후에 출입을 하셔야 합니다. 

 

 

 

두곡 고택

1733년 조선영조 9년 이언적의 6대손 이식중이 세운 집입니다. 이 후에 이언괄의 14세손인 두곡 이조원이 살게되면서 이곳을 두곡 고택이라고 불리게되었으며, 구조는 ㅁ자 이며 살림채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곳간채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는 대문채가 있습니다. 대문에 들엉서면 왼쪽에 마구간이 있는데, 지형상 서쪽이 낮고 허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터를 골랐다고 합니다. 뒷편에 작은 별채는 집안의 딸이 사용하던 방이며, 출가 후에 친정에 돌아오면 이 방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영당
동호정

 

양졸당

이의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734년(영조10년)에 세운 정자라고 합니다. 6.25전쟁 때 손실 되었지만, 1958년에 중건 하였습니다.

정면 4칸 / 측면 2칸 팔작지붕 기와집 이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건물 뒷쪽에는 쪽마루가 달려 있습니다.  

 

 

수졸당 고택

이언적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이 1616년(광해군 8년)에 지었습니다. 이의잠의 9대손인 이능수가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를 다시 지었고, 나무를 심고 아름답게 가꾼 안골동산이라 부르는 비탈진 언덕이 집을 감싸고 있습니다. 

 

상춘헌 고택 

조선 영조 1730년 영조 6년에 동고 이덕록이 지은 것 입니다.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고, 이후 대사간을 역임한 창애 이정덕이 동쪽에 사당지었습니다. 안채는 안방, 건넌방, 부엌을 둔 서울지역의 ㄱ자형 평면 형태입니다. 사랑채 남쪽 면과 행랑채 동쪽면 사이에는 작은 쪽문을 달아 사랑채 마당에서 안마당으로 손쉽게 출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근암고택

태로 이정수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의 부인 이씨가 언덕 아래 평지에 지었던 집입니다. 1880년 그의 현손인 근암 이희구가 지금 자리에 옛집을 뜯어서 옮겨지으면서 규모를 늘려 지었다고 해요. 안채 담장 밖에 따로 사랑채가 있다는점이 다른 집과의 차이점 입니다.

 

 

송첨 종택

경주손씨 큰종가 입니다. 양민공 손소가 조선 세조 5년 1459년에 지은 집이며, 사랑채에 걸린 혀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 자를 백번 쓰며인내를 기른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사랑채 뒷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5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고, 사랑채 정원의 경치가 뛰어나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특이해서 조선 전기의 옛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 입니다. 

 

 

사호당 고택

진사를 지낸 이재로가 1840년 조선 헌종 6년에 지어 살던 곳으로 아들인 사호당 이능승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ㅁ자의 구조로 ㄱ자형 안채 와 ㄱ자형의 사랑채가 잇대어져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닿은 부분에 곳간방이 있습니다. 

 

 

대성헌

조선 순조때 문과에 그베해 좌찬독과 홍문과 교리를 지냈던 물와 이재직의 셋째 아들 이능단이 철종 워녀에 분가하여 지은 집입니다. 

앞쪽에 빼어난 산봉우리의 성주봉을 바라보고 지었고, 성주봉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대성헌이라고 하며, ㄱ자형의 안채 - 자형의 사랑채 그리고 - 자형의 행랑채가 모여 ㅁ자형을 이루는 형식입니다. 

 

 

 

 

무첨당

회재 이언적 종가에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제청입니다.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 이의윤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 지었으며, 뒷편에 서당이 있습니다. 동쪽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있고,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합니다. 큰 사랑채는 독서와 휴식 그리고 손님접대와 문중회의를 했던 곳입니다. 

 

 

향단

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때 변환 중인 모침늘 돌볼 수 있도록 임금이 지은 집이라 전해 집니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의 호를 따라 집 이름을 지었습니다. 

편의성을 위해서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고 있고, 2개의 마당을 가진 구조 입니다.

 

관가정 

조선 중종 때 관리로서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의 살림집으로 중종 9년에 지은 집입니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입니다.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대청이 넓은 편이고, 본채 뒷편에 사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가 연결된 구조 입니다. 원래는 대문과 담이 없었다고 합니다. 1981년에 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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